최광현 소장의 '가족의 발견' 을 읽고
가족 심리 치유 전문가 최광현 소장의 ‘가족의 발견’을 읽고 요약 정리 및 중간중간에 느낀 점을 기록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착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고 또 착하게 행동했을 때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세계는 아이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면 막을 내린다.
특히 착한 사마리아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던 삶의 법칙과 방식이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더욱 괴로워한다.
착한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착한 아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변 환경과 어른들이 요구해 자신이 그렇게 맞추어진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지나친 겸손과 조심성, 소극적인 태도는 종종 자기 안에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나 또한 착한 아이로 살아왔고 착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좋았다.
칭찬을 들으려고 착한 일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아의 인격이 강화될수록 그림자의 인격 역시 더 커진다. 자아와 그림자는 시소와 같아서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친 행동 했다면 그 반대편에 놓일 수 있는 행위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심리적 균형을 조절해야 한다.
사람들은 균형을 잃으면 벌어질까?
모든 가족에게 기쁜 상처를 줄 수 있다.
관계의 문제는 상대방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고 자기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열쇠를 상대방이 쥐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답답함과 조급함 때로는 절망감마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열쇠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담감이 훨씬 덜해진다. 우리 인간은 삶 속에서 겪는 문제와 같은 사이 그 자체보다는 해결을 위한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에 큰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음의 병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기력이다. 무기력하다는 자기 인식은 더욱 무기력한 상황을 불러온다. 즉 무기력이 원인과 결과가 되어 지속적인 불안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주도권을 잃어버린 남성은 우울, 분노, 폭력, 무관심과 지나친 냉담함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가족 안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자녀는 성장해서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등 지나치게 주도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많은 사람에게 진짜 고통은 고통을 주는 환경 자체이기보다 자신이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큰 질병으로 인해 큰 무력감에 빠진 나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신학을 공부하게 하셨다. 공부하면서 무력감을 이겼다.
가장 연약한 존재인 젖먹이도 배가 고프면 젖 달라고 울고 떼를 씀으로써 자기의 주도권을 사용한다. 결코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환경 앞에서 절망만 하거나 상대방의 선택과 결정만을 기다리거나 그것에 영향을 주려고 애쓰기보다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을 빨리 찾아낸다면 그만큼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수치심의 원인은 수치심이 내재한 가족에 있다고 말했다. 수치심은 어린 시절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감보다는 가족 부모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발생한다. 부모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사람은 그 자신도 자녀들과 신뢰 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수 없다.
용서는 과거의 고통을 분리할 힘이다. 우리 내면에 있는 분노를 똑바로 보게 하고 죄책감과 수심을 자기 내면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힘들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을 용서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자신의 실수와 어리석음, 남에게 주었던 상처 등에 대해 우리는 그 누구보다 똑똑히 기억하며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
우리는 평생 사랑이 필요한 존재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존재에서 누군가를 책임지는 존재로 성장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해 사랑이 필요하다.
자신이 삶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을 수용하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선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다. 회복은 결국 사랑에 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모든 결과는 사랑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
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 사랑이 필요했고 사랑받기를 갈급했다.
또한 자녀들에게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다.
트라우마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보이는 특성은 부정적인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끊임없이 떠오르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지 않아 고통스러울 때 새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고 권한다. 자유롭게 창공을 나는 새의 시각은 대개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 이런 새의 시각으로 보면 현재의 모든 근심과 복잡한 생각들을 넓게 멀리 볼 수 있다. 또 그동안 너무 근거에 있어서 한 귀퉁이밖에 보지 못했던 두려움과 근심의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올라오면 그것을 휩쓸려 누구나 극도의 불안과 혼란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생각을 감독하고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를 새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나와 내 주변에 새롭게 조망할 수 있다. 비로소 나와 세상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중독 문제의 근원지는 언제나 가족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가족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어른 시절 가족에게 받았던 상처와 분노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성장하여 마음의 문을 꼭 걸어 잠근 것이다.
모든 가족관계는 과거와 현재가 복잡하게 뒤엉켜져 있다. 가족 안에서 생겨난 트라우마는 마치 도미노처럼 다른 트라우마를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가해자는 1명이지만 피해자는 여러 명이 될 수 있다.
부모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자녀는 문제 행동을 보일 뿐만 아니라 특정한 신체적 증상도 보인다. 대표적인 신체적 증상은 거식증, 폭식증과 같은 식이장애이다.
거식증에 걸리는 사람은 반항적이거나 공격적이어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유형이 아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고 피해도 안 주는 유형이다. 주위를 지나치게 신경 써서 가능한 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남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사람들이다.
음식 거부는 가장 강력한 저항과 거부의 행동이다. 음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를 거부하면서 가족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자녀를 자기의 욕구를 채워줄 도우미 또는 반려견으로 본다는 것이 문제다. 자녀의 불안과 절망, 과도한 책임감과 무력감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엄마 밑에서 어떤 인정이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족의 욕구 속에 밀려 있을 때 아이에게는 거식증과 폭식증이 나타난다. 식이장애를 통해 가족들에게 뭔가 호소하는 것이다.
과식증과 폭식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가족 체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이중구속 소통의 문제를 가족 모두가 인식하고 소통방식의 변화를 시도하면서 가족의 문제를 과도하게 떠안고 있지 않는지 살피고 그러한 역할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더 이상 파업 할 필요도 반항을 할 필요도 없게 말이다.
성격 차이란 성격이 달라서가 아니라 너무 비슷하므로 생긴다. 유사성은 오히려 적의와 분노를 낳는다. 깊은 갈등은 언제나 이질적인 두 존재보다 가장 유사한 두 존재, 두 집단, 두 문화 사이에서 발생한다.
특히 닮은 부분이 많은 남녀의 갈등은 상대방도 나와 같을 것이라는 거울 생각의 함정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깨졌을 때 견딜 수 없는 실망감과 이해받지 못했다는 소외감에 빠지게 된다.
상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수많은 실망과 갈등을 낳는다. 자녀들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때 많이 화가 났다.
감정 이입이 필요하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회피하도록 유도하기보다 감정을 공감해 주어야 한다. 거울 생각으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을 막는 방법은 서로 적절하게 공감하는 것이다.
공감은 상대 감정을 존중 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성격 차이로 갈등을 겪는 남녀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서로에게 공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두 사람은 분노하게 되고 더욱 날카로워져서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
따뜻한 공감의 말 한마디는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꼭 필요할 때 하지 않으면 자칫 깊은 상처와 실망과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 가족 내 갈등은 문제의 해결은 가족들이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가족들이 자기 안에서 비추어 보고 그들의 의도와 느낌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감정을 공감하게 되면 그동안 유지해 온 자기만의 시각과 생각의 변화가 온다. 나의 선입관을 통해 상대를 바라보지 않고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열린 마음으로 보게 된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공감을 통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오해하는 일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또 상대를 자기 행동에, 틀에 꿰맞추는 거울 생각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자 성격 차이에서 발생한 수많은 갈등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도구는 공감이다.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아니 표현이 부족했다. 아내가 말할 때 공감을 해주면 좋았을 텐데 그저 듣기만 했고 때로는 비난했다.
많은 사람이 과거의 일에 붙잡고 살며 앞으로 일어나지 않은 미래 일을 걱정한다. 또한 자기중심적 사고를 인해 이러한 성향이 강화된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하는 일 중 90%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는 불필요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스스로 우리의 시각을 감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균형 잡힌 시각 속에서 현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불안한 인간에게 있어 그 어떤 고난보다 견디기 힘든 감정이다. 어쩌면 가족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은 불안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약점이나 나약함을 노출될 것이 두려워하는 것이 노출 불안이라 불린다.
노출 불안에 시달린 남자는 자신감이 넘치는 척 강한 척을 하면서 폭력, 폭언 욕설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가 하면 노출 불안에 시달리는 여자는 냉정하고 쌀쌀맞고 차갑고 강한 모습을 만들어 낸다. 그럼으로써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자기 내면의 만성적인 불안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감춘다.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 속에서 '아! 그래요?'라고 말함으로써 상대방이 던진 투사의 걸리지 않고 적당한 경계를 유지하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기술을 체득하도록 하자. 우리 안에서 발생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 원망, 하소연, 비아냥거림, 시비 걸기 등 부정적인 감정의 폭발에 마주하는 순간에 '아! 그래요?'라고 말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보다는 비슷한 사람들과 더 많이 갈등하고 경쟁한다. 회사나 교회 등 집단 내에서 나와 긴장 관계 또는 갈등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들을 찾아보면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경쟁하고 갈등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가족 문제는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또 누군가는 이것을 관찰하고 반응하면서 그 영향이 돌고 돈다.
가족을 살아 있는 하나의 유기체로 본다. 가족이 유기체라는 말은 구성원이 따로 독립된 존재가 아닌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공동체 일원으로 존재하는 의미다.
가족은 언제나 일정한 긴장과 갈등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가족 향상성이다. 가족 향상성은 나아가 가족의 문제와 증상이 어떻게 계속 유지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즉, 패턴화된 가족 증상을 아주 잘 설명해 준다.
집단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한 상태를 유지했고 아이들 눈에 띄지 않도록 점점 궁금하며 살았다. 자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학교생활 최대 목표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내면에는 분노의 감정이 쌓였고 혼자 있는 밤이 되면 게임을 통해 풀었다. 게임 속에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고 겁먹을 일도 눈치 볼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게임에 빠지게 된 것이다.
가족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의 서열 즉 가족 내 자기 자리가 분명해야 한다. 만일 가족 구성원 중에 자기의 서열이 무시되고 불분명한 위치를 점한 사람이 있을 때 가족 안에서 반드시 갈등과 문제가 생긴다. 가족 갈등과 문제는 가족 안에 존재해야 하는 사랑의 질서가 무너질 때 발생한다.
우리에게 가족은 영원의 공동체이다 같은 집에 살며 많은 것을 공유하고 살아간다. 마음속 깊이 내면마저도 공유한다. 가족 안에는 그 가족만이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이 존재한다. 가족의 집단 무의식은 그 가족이 오랜 세월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종목들뿐만 아니라 해소되지 않은 아픔과 상처를 딛고 있다. 정신적인 문제는 서너 세대에 그치지 않고 그 가족 안에서 전이 된다.
아버지에 대한 딸의 적개심은 남자에게 행하게 된다. 즉 아버지와 달리 성공하지 못하고 잘생기지도 않은 사람 즉 단정하지 않거나 건강하지 않은 남자를 선택하여 복수를 한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남편을 아버지와 동일시 하였고 아버지에게 분노와 적개심을 가졌으나 표현하지 못했던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외로울 때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 소중한 가족과 함께 있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큰 외로움을 느낀다.
칼 융은 여자가 잔소리했을 때 남자가 우울하고 언짢아지는 것은 남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라기보다 아니마와 아니무수 간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부정적인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자는 남자의 약점과 실수를 지적하고 잔소리를 함으로써 남자에게 죄의식, 패배감, 열등감을 심어주고 남자가 부정적인 아니마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자와 여자의 소통은 뒤엉키게 되고 부정적인 아니마와 아니무수가 강화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부부간에 잘못된 소통의 문제는 나의 관점이 아닌 상대방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남녀 간 소통의 문제에는 심리학의 관점 바꾸기 기법이 필요한 것이다. 남녀가 서로 관점을 바꾸거나 감정 이입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어떤 장애물도 허물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 내면에 올라오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서로 싸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와 자녀 간 대화의 단절은 부모와 자녀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다. 대화의 단절은 자녀가 부모에게서 공감을 얻을 기회를 박탈한다. 그것은 곧 자녀에게 정신적 단절과 함께 인간관계에서의 좌절을 경험하게 한다. 심한 경우 감정의 발달이 거의 멈출 수 있다. 대개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려는 능력이 떨어지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남자아이들은 또래 집단 안에서 서열을 매기고 관계를 맺어 나간다. 그때 자연스럽게 그러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 첫 번째 조건이 공감이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유하는 능력이다. 공감은 보통 다음과 같이 형성된다. 대화할 때 상대방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 상대방은 자신이 이해받는다고 느낀다. 그러면 두 사람 간의 신뢰가 쌓인다. 타인 감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으로 상대방이 표현하는 것에 주파수를 맞출 수 있다. 그 순간 별개의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연결이 된다.
부모와의 사이에서 공감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 문제는 더 있다. 타인의 감정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감정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견이나 요구, 욕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어린 시절 공감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한 아이들이 이기적이고 삐뚤어진 성격을 갖게 된다.
우리가 나와 다른 방식을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공감 능력 덕분이다. 비록 상대와 똑같은 감정이 느끼진 않지만, 그의 기분이 어떨지, 입장이 어떤지, 어떻게 생각하는지 헤아릴 수 있고 이것이 서로 간에 소통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크게 떨어지면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 생각과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해서 관계는 물론 대인관계에서 힘든 일을 많이 일으킨다.
공감은 남녀관계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에서도 행복을 위한 열쇠다. 서로의 감정에 잘 공감하는 부부는 결혼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결혼 생활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족치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이다.
가족이 서로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때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고 한 번 더 참고 살기로 마음먹게 된다. 공감의 한마디, 공감의 눈빛, 공감 어린 시선이 가득한 표정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고 비뚤어진 의사소통에 변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공감을 통해 진정으로 감사와 존중의 감정을 갖게 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는 우리의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와 같은 감정을 옮길 수 있게 한다.
행복한 가족을 위한 비결이 정면 돌파가 아닌 측면 공격이다. 행복한 가족생활을 위해 부정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대신 긍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행동을 촉진하여 부정적인 요소나 문제를 중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필요한 최고의 행동은 감사이다. 감사의 말을 건넬 기회를 놓치지 말자. 감사의 말을 건네자. 잔물결이 생겨 더 많은 사람과 함께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벌고자 하지만 그에 몰두하는 사이 가족 안에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보고 당황하게 된다. 가족의 행복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서적인 만족감이 더 크게 좌우한다.
사랑을 말로 행동으로 적극 표현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필요한 능력이 정서적 소통이다. 정서적 소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일례로 우리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손톱 뽑는 수술에 관해 이야기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말하는 이유와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정서에 쉽게 전염될 수 있는 이유는 '거울 뉴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도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요즘은 자녀에게 많은 상처를 받는다.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이는 내게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자녀들과 정서적으로 더 많은 소통을 해야겠다.
우리의 삶은 우리는 가족에서 시작해서 가족에서 끝난다. 내가 지켜야 하고 가꿔야 하며 고난 속에서도 지켜야 한다. 가족은 나의 최후 보루가 된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행복한 가족이 있으면 걱정이 없다.
나는 질병으로 4박 5일 동안 지독한 항암 주사를 12번 맞았다. 맞을 때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가족 품으로 돌아와서 위로와 쉼을 받고 견디며 이겨냈다.
‘가족의 발견’을 읽고 가족에게 감사하며 더욱 많이 공감하고 사랑하면서 많은 대화를 통해 행복한 가정을 지키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