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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역 (로버트 리탐)을 읽고아는 게 힘 2025. 1. 16. 17:04
IVP 조직신학시리즈
그리스도의 사역 (로버트 리탐)을 읽고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을 중심으로 접근했다.
1. 선지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한 번도 자신을 선지자로 주장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이 자신을 선지자와 동일시하지 않으신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분의 신분 그 자체이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와도 비교할 수 없다.
선지자들은 모두 죄 있는 인간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종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원 전부터 성부와 동등하신 분이셨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준다고 선언하셨다.
요한은 복음서 서론에서 예수님을 육신을 입은 말씀으로 즉 만물을 창조하였고 태초에 하나님과 구별되면서 일치되는 말씀으로 묘사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지지만 선지자들의 권위는 단지 유임된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구원이지만 마지막까지 그분을 배척하는 사람에게는 그분의 말씀이 마지막 날에 그들의 재판장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육신한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분은 선지자보다 위대하셨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화되어야만 하나님이 말을 전했고 보통 타락한 인간, 죄성을 가진 연약한 자였다.
반면에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요, 육신을 입은 말씀으로써 그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다.
성령은 그분의 예언적 사역을 따르는 자들을 추려낸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선지자 곧 가장 위대한 선지자요, 최종적인 선지자다.
이는 그분이 선지자들, 천사들, 모세와 다른 모든 경쟁자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후에 그분의 선지자적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
대책을 세심하게 마련하셨다. 그분은 사도들을 지명하셨다.
사도에게는 뚜렷한 특성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명확한 임명을 받았다.
둘째, 사도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행했다.
셋째,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 노릇을 했다.
사도들은 바로 그 특정한 목적에 의해 선택되었다.
나아가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증거는 하나님에 의해 복음 메시지로 고정되었다.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과 부활의 사건, 부활의 구원 사건들과 나란히 그들의 사역의 절대적 요소로 편입된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 사이에 분리란 있을 수 없다.
우리에게 다른 대안이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 자체를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의 한 측면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스도가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내주하며
그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이와 같이 부활한 그리스도는 주님의 영이요, 성령은 주님의 영이다.
성령이 성경의 원저자이다. 성경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했을 때 의미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은 하나님의 영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 저자의 생각을 사로잡은 성령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인간성을 억누르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표현한 생각들은 진정으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기원은 성령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생사는 궁극적으로 성삼위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배후의 성삼위의 위격 사이의 관계를 볼 때 성경은 아들이 참여한 결과다.
우리는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신뢰하는데 성경이라는 부가적인 신앙의 대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위대하고 중심적이며 최종적인 선지자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역과 길을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의 화신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주요 유지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약과 구약에서 발견되는 바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말씀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이다.
2.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대인의 상황에서 선포하는 일을 했다면, 제사장들의 주된 역할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동료 인간을 중재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했고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했다.
제사장이 자신과 공동체를 위한 예물과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가 대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중재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그들을 향한 야훼의 축복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야훼에 의해 직접 임명되었다.
그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과 동일한 고난과 시험을 경험했기 때문에 백성과 공감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을까?
첫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했다.
둘째, 그는 선지자적 기능을 수행했다.
셋째, 대제사장은 모든 제사장과 함께 이스라엘의 언약적 축복을 선포함으로써 백성을 축복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제사장직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 제물을 드리는 일을 담당했지만 대제사장만은 일년에 한 번 대속죄 일의 예식을 담당했다.
본질적으로 그는 속죄와 화해의 기능을 수행했다.
오직 대속죄 일에만 야훼가 허락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도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야훼가 직접 제정하신 조건 하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성소의 가장 내밀한 장소인 지성소는 언약의 법궤가 보관되어 있었고 두 수랍이 지키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야훼 영광이 임해 있었다. 법궤를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현상들을 상기해 보면 그 금령에 수반된 깊고 두려운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존전에 접근할 권리가 없었다.
심지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도 그런 권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백성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야훼 존전에 들어갈 수 있는 이였다.
하지만 그도 1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때에도 자신과 백성을 위한 희생의 피를 지니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제사장직을 주장하신 적이 없었다.
자신의 죽음을 희생적인 피 흘림으로 봄으로써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제사장적 배경에 위치시키셨다.
그분은 마침내 그의 사도들과 헤어질 때 축도로 그들과 이별하셨다.
베드로는 그분의 죽음을 흠없는 제물로 묘사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 유월절 양,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귀 후에 하나님이 우편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대언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보하신다.
오직 예수님이 먼저 우리의 왕이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이 가장 강조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혈과 육을 공유하신다.
그분은 고통을 당하고 시험을 참으며 죽임을 당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자신이 대표하는 자들과 연합하신다.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연약함을 가지고 계셨다.
그분은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고투에 공감할 수 있으시다.
히브리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실은 그리스도가 제사장으로서 아론계의 대제사장이 했던 것처럼 속제죄를 들이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수적으로 피 흘림이 수반된 화목의 제물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리스도 예수가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으며 유효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단번에 이룬다는 것이다.
모든 차이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론의 제사는 인간의 죄를 속하는 본질적인 능력이 없는 동물 제사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의 제사는 무지한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그분은 제사장이며 제물이요, 드리는 자며 들여지는 제물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아론 계열 대제사장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제사장직을 폐지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중보와 축복에서 대제사장의 기능을 계속하신다.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피하고 싶을 때에도 예수님은 성부에게 순종하셨다.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순종이 제사장적인 활동에 부합하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순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대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전 생애도 대리적인 것이다. 그분의 삶은 하나님의 통일성을 가진 총체였다.
그리스도는 태아기에서 유아기를 지나 사춘기를 통과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모든 단계를 경험하셨다.
그분의 경험은 한 개인의 것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분의 전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순종이 그분의 전 생애에 걸쳐 있으므로 그분의 삶의 모든 부분과 모든 국면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십자가에서의 구속의 고난뿐만 아니라 겟세마네에서의 범민에 찬 슬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다한 순종, 성부께 드리는 기도 역시 우리를 대신하신 것이다.
그분의 경우의 믿음은 죄를 회개하면서 우리가 발휘하는 그런 종류의 믿음이 아니었다.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된 믿음이었다.
그것은 그분의 전 생애의 헌신이 수반된 성부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가 대리적인 것이었다면, 그분의 경건의 모든 측면에도 우리를 위한 것이 꼭 우리를 대신한 것이다.
그분의 믿음, 그분의 순종, 그분의 신실하심, 그분의 기도가 우리를 위해 전용된다.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서 그분은 거룩한 하나님께 받아들일 수 있는 경배와 찬송, 흠 없고 순결하며 완전한 신실한 삶의 열매를 드리신다.
그 완전한 중보를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것이 되어 우리 자신을 그분의 손에 위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는 바로 그 이후로 우리도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다.
그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온전한 중재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데 그리스도만으로 절대적으로 충분하다.
그분은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실로 그분의 구원 사역이 전 우주를 포괄하듯이, 우리의 타락에서 세계에서 사회적, 경제적 불의를 바로잡는 것은 구속적 핵심의 요소이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죽음 그 자체 십자가가 잔인한 죽음을, 십자가의 잔인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분과 경쟁할 자는 없다. 그분이 최고다. 만약 우리가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중심에 놓으면 그리스도가 왕자에서 축출된다.
제사, 중보와 축도도 그분의 것이며,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믿음과 예배도 그분의 것이다.
우리의 도구와 경건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표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다.
한편 교회의 외교적 개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장직에 도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사장직에 대한 모든 교리는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끝내야 한다.
제사장직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있고 교회는 거기에 참여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개인은 교회의 배경에만 고려된다. 모든 사람을 개인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은 제사장적 사역에서 핵심을 이룬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것은 도저히 인기 있는 메시지일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회피하려는 사도가 많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야 할 아무런 외적인 압력도 받지 않으셨지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의 행동이다.
구원을 작정하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속죄 외에는 하나님의 본성에 부합하는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유효하고 언제든지 효력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혹은 반복해서 들여질 필요가 없다.
사역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성격상 완전하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물로 들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약 제사 제도의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셨으며 하나님의 율법의 권고들을 기꺼이 지키셨으며 긍극적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셨다.
여기서 전체성의 요소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전체적인 것이다.
그분의 삶과 사역이 자발적인 순종의 능동적인 책임의 완수이며, 동시에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다한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순종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분의 고난은 자발적인 것이며 인류를 위해 그분이 스스로 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 순종의 전 세계가 그분을 의롭다고 혹은 그분이 순종하셨다고 선언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의 형벌을 담당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수행하셨지만 십자가에 십자가가 제외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실현된 것은 특별히 십자가에서이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지상에서 행하신 모든 것을 수반하지만 가장 현저하게는 속죄와 죽음을 포함한다.
성경적 속죄 교리의 핵심은 대리 형벌이다.
형벌이라 일컫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징벌을 견뎌내셨음을 의미한다.
그분은 베드로가 자신을 배반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분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분은 양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셨다.
대리 형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잔인하고 뒤틀린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이 지불할 수 있는 궁극적인 값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다.
속죄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의로우며, 그분의 의는 사랑의 의이며, 십자가는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으로 그분의 공의와 균형을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실 때 하나님의 최고 관심사는 자신의 공의를 보여주고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바로 의로운 사랑이어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채를 갚으시고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당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그 장벽을 극복하셨다.
하나님의 진노가 대한 그분의 확정적이고 인격적인 적대감이라는 것은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발생하며 따라서 속함이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보내실 때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사랑이다.
화목 제물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준비된다. 그것은 가혹하고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일에는 성삼위가 전부 참여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체가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행위였다.
화목에 대항하여 속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정도까지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버림받은 체험으로써 착취적인 엘리트에 의해 기본적인 인권마저 박탈당한 사회에 소외된 자들과 하나가 되셨다.
교회는 압재당하는 자들, 비인간적인 존재로 버림받는 것이 분명한 자들과 연대함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화목제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과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친구의 관계로 바꿔 놓으셨다.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화평이시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을 화목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성부에 대한 순종의 행위이다.
우리는 만세전에 그분 안에서 선택되었다. 십자가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죽으셨지만,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죽었다.
이는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분의 죄와 세력과의 그런 철저한 단절을 가져오는 이유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죄와 사단의 충만한 세력이 소진되었다.
우리는 죽었다. 죗값이 온전히 치러졌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유일하고도 완전히 충분하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유일하다.
십자가에서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때문에 그것은 유일하다.
또한 다른 어떤 속죄 제물도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일하다.
그것이 충분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모든 죄를 없애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친구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그것은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완전하다. 그것은 완전히 성취되었다.
3.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자신을 왕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왕의 기능과 권위를 행사하셨음을 부인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더욱이 그분의 충만한 권세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부활에서였다.
그분은 하나님이 우편으로 올리워서 온 우주에 대한 권리를 받으신 것은 그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우주는 그의 안에서 창조되었다. 또한 그를 통해 만들어졌다.
또한 그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스도는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것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신다.
다른 한편 그분은 성육신 하신 아들로서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서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절대적인 권세와 자리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결국은 우리와 전 피조계를 구속하실 것이다.
성경은 창조 속에서와 창조 너머에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분은 영원한 아들로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성실한 아들로서 만물을 갱신시키며 회복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것은 부활과 구속에 초점을 두면서 그분의 교회를 완전한 구원으로 이끌기 위함이다.
동시에 우주 자체도 해방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는 우주적인 찬양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성삼위 사이에서는 경쟁이 없다. 우리가 그분을 주라고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피조물도 그것의 본질적 역동 속에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따라서 인간성을 영화롭게 만드는 조화와 통일성 속에서 완성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류를 어떻게 만드실지를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왕권은 한 면에서 보면 부활에서 시작되어 재림으로 끝나는 한시적인 현상이다.
재림 때 그의 왕권은 하나님이 계약하신 영원한 상태로 합류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 중보자로서의 우주를 통치하고 계심을 보았다.
성령이 임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날 이후 제자들은 능동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과감하게 박해에 직면했으며 가난한 자와 소외당한 자들에게 아낌없는 관심을 기울였다.
더욱이 성령은 어떤 인간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성취하였다.
성령은 제자들을 고도의 팀 정신으로 뭉친 운동팀 같은 단순한 개인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만들었다.
교회는 십자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과 무덤에 대한 그분의 승리의 열매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증거하는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다. 오직 그분만이 세상의 소망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다.
완전한 인간이면서도 그분은 신분과 존재에서 하나님과 하나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사역은 완전하시다.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졌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에게서 표현된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선지자자로서 지상 사역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다.
그분은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이 믿는 교회는 새로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활할 것이다.
만물이 그 앞에 무릎 꿇고 모든 입술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심을 시인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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